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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생기념병원 (BONGSENG MEMORIAL HOSPITAL est. 1949) 전문센터/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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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이식센터

신장이식수기

봉생기념병원 신장이식 수술 1000례 기념 ‘희망+나눔 이야기 수기공모전’ 수상작을 소개합니다.

[장려상] 콩팥 이식의 새 생명 - 정선화 님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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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저는 53세의 나이로 신장이식을 받은 지 4년의 시간을 잘 지내고 있는 신장이식 환자입니다. 신장이식하기 전 저 나름 힘든 생활을 겪으며 어렵게 신장이식을 결정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지요. 2002년 처음 사구체신염을 앓으며 송도에 있는 “ㄱ병원”을 다니며 입원해서 약을 먹었고 퇴원해도 될 만큼 좋아진 상태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해를 보낸 2012년 발이 퉁퉁 부어올라 신발을 신을 수 없을 정도가 되는 어느 날 신장이 다시 안 좋아졌나? 하는 생각으로 예전에 다니던 병원으로 가서 확인하니 신장 기능이 급격히 나빠져 결국 iga 신증이란 만성 신부전증이 되어 있더군요.

신장 기능이 겨우 12% 남아있어서 투석이나 이식을 받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절망적인 말씀만 하시더군요... 그래도 저는 투석과 이식을 거부한 채 투약할 수 있는 약만 처방받은 채 돌아와 예전보다 더 열심히 운동과 자연치유로 나을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고 나름 열심히 건강을 되찾으려고 노력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선 투석과 이식을 강요하였고 전 그게 싫어서 병원을 옮겼습니다. 초량에 있는 "ㅁ병원“으로 옮겨 몇 달 간 약만 열심히 먹고 집에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2012년 7월의 어느 날, 감자와 토마토를 많이 먹게 되는 날이 왔는데요.

감자와 토마토는 칼륨 성분이 많아 신부전 환자에게 금기시되는 식품인데도 맛있게 보여 저는 많이 먹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손끝에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손을 막 털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저 혼자 애를 썼지만 자꾸 온몸으로, 아니 입술까지 굳어지는 느낌이 왔고 식은땀이 나며 정신도 혼미 해지고 있었습니다. 식구들은 다급한 마음에 제 몸을 주무르고 응급처치를 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남편은 119를 불렀고 전 그길로 119 구급차에 실려 제가 다니는 초량 “ㅁ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간호사와 선생님들이 번갈아 가며 여러 가질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오늘 먹은 게 뭐냐고.... 전 똑바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신부전증에 아주 좋지 않다는 음식을 먹었으니 말입니다. 감자와 토마토 조금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피검사와 관장을 여러 번 시행을 했고 힘들었습니다. 후회도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한참 뒤 응급실 선생님이 오시더니 다행히 응급투석은 받지 않아도 될 만큼의 수치는 나왔지만 위험했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더 수치가 높았으면 응급투석을 받아야만 했다고... 전 한숨을 쉬며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날 주치의 선생님이 이러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하시며 투석이나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정신이 있느냐고... 절 야단치시면서 강한 어조로 설득 시키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일단 퇴원하고 며칠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고 단호한 퇴원의 뜻을 밝히고 집으로 왔습니다. 전 퇴원을 핑계로 시간을 벌게 되었고 그러던 중 우연히 지인분의 소개로 개인병원인데 투석을 병행하는 내과 전문의 선생님을 소개해 주시더군요. 해운대 “ㅇ내과” 원장님을 뵙고 투석과 이식은 하기 싫다는 저의 뜻을 전했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뜻을 충분히 헤아려 주셨고 현재는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투석이나 이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까지 왔기 때문에 망가진 신장을 건강하게 되살릴 수 없다는 말씀을 친절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전 선생님 말씀에 믿음이 갔고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이병원은 왠지 편했습니다. 이후 처방대로 약을 계속 먹었고 저의 몸이 어느 정도 지탱이 된다 싶었지만 어느 날부터 밥을 먹지 못했고 물이 들어가도 올리고 복부가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군요. 병원을 다시 찾은 저는 X-ray를 찍었고 심장에 물이 반 차있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며 이대로 가면 오늘 밤 넘기기 힘 들하고 하시는 말씀에 눈물이 줄줄 흐르더군요. 제가 그동안 견뎌오며 열심히 식이요법을 지키고 지내왔던 한순간이 무너지고 있었으니까요.... 남편은 절 설득시켰고 할 수 없이 투석을 받기로 했습니다.

첫날이라 2시간 받았는데 몸이 조금은 편안한 상태가 되는 게 신기했습니다. 이후 저는 이틀에 한번 투석을 받기로 결정이 되었고 받으면서 예전의 힘든 생활보다 편안하고 조금 더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투석을 받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이식을 한번 생각해 보라고.. 평생을 투석만 받게 되면 힘들고, 이식을 받게 되면 투석보단 좀 더 편한 생활이 될 거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죠. 저도 조금씩 맘이 바뀌면서 이식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식을 원한다면 서울까지 힘들게 가지 말고 지방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시며 좌천동에 있는 봉생병원을 소개해 주시더군요.

이식의 생각을 안고 봉생병원에 내원하여 원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차트를 보시고 여러 군데 병원을 옮겨 다닌 흔적을 알게 되셨을 거고 또한 투석과 이식을 거부하면서 힘들게 생활을 했을 거라 생각하신 거 같습니다.
제 나이를 봤을 때 이식은 빨리하는 게 낫다는... 투석을 받을 때까지 받다가 이식을 하게 되면 모든 기능의 저하로 이식도 힘들어진다는.. 등 여러 가지 설득력 있게 말씀을 하시며 이식을 결정하게끔 해주신 김중경 원장님, 감사합니다. 

제 여동생이 저에게 신장을 주기로 하였기에 저는 그날부로 모든 검사를 받기로 동생과 함께 차근차근 검사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궁근종과 선근증을 가지고 있었던 저는 자궁 적출술을 동시에 원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식 날짜가 임박하여 될지는 모르겠다고 고민을 하셨지만 신장이식을 2주 남기고 자궁 적출 술을 먼저 시행했습니다. 2주 뒤에 신장이식 수술이 남아 있었기에 더욱더 신경을 써주신 산부인과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느 정도 회복 후 드디어 이식하는 날인 투석 7개월의 막을 내리고 2014년 2월 11일.. 동생과 저는 나란히 수술대에 누워 동생이 준 사랑의 선물인 콩팥 한쪽을 편안히 잠든 상태로 수술해서 잘 받고 나왔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으며 동생은 일주일간의 입원 후 퇴원하였고 저는 6일간 무균 실과 2주간의 일반병동을 거치며 매일매일 건강을 회복하며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습니다. 이식하고 나니 이렇게 몸이 편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있는 상태가 되고 보니 지난 힘들었던 저의 자만으로 제 몸을 더 악화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중경 원장님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보호 아래 밝은 모습, 건강한 육체를 안고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퇴원 후 주기적인 검사와 약을 복용하고, 모든 음식이 투석 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더 자유로워진 식생활이 반가웠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 매일같이 스트레칭과 운동을 병행하며 집안 일과 바깥나들이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어, 나쁘게만 생각했던 신장이식을 정말 잘했다는 생각과 행복한 맘으로 지금도 열심히 즐겁고 행복하게 가정을 잘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신장 신부전으로 고생하는 많은 환우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처럼 자연치유로 혼자 극복해 보겠다고 하루하루 지친 생활 속에서 힘들게 살고 계시는 분, 투석을 받으며 이틀에 한 번씩 온정신을 쏟으며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환우 여러분, 저의 신장이식 전의 과정이 가슴에 와닿는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저 역시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이식이었습니다. 생각을 한번 바꿔 보시면 이식이란 또 다른 새로운 생명을 덤으로 얻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부전 환우분들 힘내십시오!!! 살길은 열려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해당 글은 정선화 님께 원고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